2024~2025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 흐름은 완전히 달랐다. 삼성전자는 2024년 7월 고점 88,800원에서 2025년 11월 저점 49,900원까지 약 44% 하락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같은 기간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며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두 회사의 운명을 가른 것은 HBM이었다.

HBM 전쟁의 서막 — 왜 이 제품이 모든 것을 바꿨나
두 회사의 격차를 이해하려면 HBM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AI 모델이 연산을 할 때, GPU는 쉴 새 없이 데이터를 요청한다. 그런데 일반 DRAM으로는 데이터를 공급하는 속도가 GPU의 연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GPU가 아무리 빨라도 옆에 붙은 메모리가 느리면 전체가 멈춘다. 이 병목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HBM이다.
HBM은 일반 DRAM 칩을 5층, 8층, 12층으로 수직으로 쌓고 TSV(실리콘 관통 전극)라는 초미세 구멍으로 연결해 데이터 전송 속도를 극단적으로 높인 제품이다. 엔비디아 H100 GPU 하나에 HBM이 6개씩 붙어 있다. GPU가 많이 팔릴수록 HBM도 많이 팔리는 구조다.
그리고 HBM은 단순히 많이 팔리는 게 문제가 아니다. HBM은 일반 범용 D램 대비 평균판매단가(ASP)가 최소 5배에서 최대 7배 이상 높다. 같은 웨이퍼로 만들어도 HBM이 훨씬 비싸게 팔리기 때문에 누가 HBM을 더 많이, 더 잘 만드느냐가 결국 실적을 결정한다.
SK하이닉스 — 선점의 경제학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을 선점한 건 운이 아니었다.
SK하이닉스는 2013년부터 HBM 개발을 시작해 2015년 세계 최초로 양산에 성공했다. 엔비디아가 AI 서버 시장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 기술에 투자해온 것이다. 선점의 결과는 숫자로 나타났다.
2026년 1분기 기준, SK하이닉스의 HBM 시장 점유율은 58%로 1위를 지켰다. 엔비디아 베라루빈(Vera Rubin) 플랫폼의 HBM4 물량 중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고, 구글 TPU용 HBM3E 첫 번째 공급사로 선정됐다.

SK하이닉스 전략의 핵심은 장기계약 중심의 안정적 수익 구조다.
빅테크 기업들이 수년치 HBM 물량을 미리 확보하는 장기공급계약(LTA)에 나서면서,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향후 3~5년간 수요를 사전에 확보하는 셈이어서 실적 안정성이 크게 높아졌다.
HBM은 주문 생산 방식에 가까워 범용 D램처럼 시황에 따라 가격이 널뛰지 않는다. 좋을 때 덜 벌지만, 나쁠 때도 손해를 덜 본다. SK하이닉스가 메모리 사이클의 롤러코스터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주가를 유지하는 이유다.
삼성전자 — 거인의 실수, 그리고 반격
삼성전자는 반도체 업계의 절대 강자다.
DRAM 시장 점유율 1위, NAND 시장 점유율 1위, 파운드리 2위. 메모리를 가장 많이, 가장 싸게 만드는 회사다. 그런데 바로 이 ‘규모의 강점’이 HBM 경쟁에서는 약점이 됐다.
HBM은 단순히 더 많이 만드는 싸움이 아니다. 칩을 수직으로 쌓는 패키징 기술, 각 칩을 연결하는 TSV 공정, 발열을 잡는 소재 기술이 모두 맞아떨어져야 한다. 삼성전자 HBM3E 12단 제품은 TC-NCF 패키징 공정의 수율 문제로 엔비디아 납품이 늦어졌고, 올해 하반기부터 엔비디아 공급망에 합류했지만 납품 규모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더 아이러니한 상황도 있었다. 삼성전자 HBM3E 12단의 영업이익률은 30% 수준으로 추정되며, DDR5 등 범용 D램의 영업이익률 60% 이상과 비교하면 지금은 HBM3E를 생산하는 게 오히려 손해인 상황이다. HBM을 만들고 싶어도, 범용 D램이 더 남는 장사인 셈이다.
파운드리 사업의 적자도 발목을 잡았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만 만드는 회사가 아니다. 시스템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부가 있는데, 이 부문이 TSMC와의 경쟁에서 밀리며 적자를 이어왔다. 메모리 사업이 아무리 잘 나가도, 파운드리 적자가 전체 실적을 갉아먹는 구조였다.
그러나 2026년 들어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2026년 HBM 매출을 3배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HBM4 출하를 2026년 1분기부터 본격화하고, 2026년 HBM 공급 물량을 이미 완판했다. HBM4의 코어다이를 10나노급 6세대(1c) D램으로 개발하며 기술 격차도 빠르게 좁히고 있다. 파운드리도 가동률 개선과 원가 절감으로 적자 폭을 줄여가고 있다.
HBM4 — 판이 바뀌는 순간
지금까지는 HBM3E 시대였다. SK하이닉스의 독무대가 이어져 왔으나, 2026년 하반기부터 HBM4 시대가 열릴 예정이다. 여기서 판이 바뀔 수 있다.

HBM4는 기존 HBM3E 대비 대역폭이 최대 3.3배 넓어지고, 전력 효율도 20~60% 향상된다. 기술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HBM4부터는 ‘베이스 다이(Base Die)’라는 두뇌 역할을 하는 칩을 파운드리 최첨단 공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TSMC 3나노 공정을 활용한다. 즉, HBM4부터는 단순히 메모리를 잘 만드는 것을 넘어 파운드리 공정 협력 능력까지 경쟁력에 포함된다.

출처 : 연합뉴스
삼성전자는 IDM(설계·제조 통합) 구조로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어 수율과 납기 유연성에서 구조적 강점이 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TSMC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HBM4 세대는 삼성전자의 반격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SK하이닉스도 용인·청주 신공장에 13조 원 규모 AI 메모리 패키징 허브 투자를 확대하며 1위 자리를 쉽게 내줄 생각이 없다.
두 회사를 어떻게 봐야 하나
투자자 관점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같은 메모리 기업이지만 전혀 다른 특성을 갖는다.
SK하이닉스는 HBM이라는 킬러 제품을 가진 회사다. AI 수요가 계속되는 한 실적의 방향성이 명확하다. 대신 NAND 사업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HBM4 이후 경쟁이 심화되면 점유율 방어가 과제가 된다.
삼성전자는 메모리·파운드리·가전·스마트폰을 모두 가진 종합 전자 기업이다. HBM 경쟁에서 뒤처지며 주가가 많이 빠진 상황이지만, 바로 그 점이 기회가 될 수 있다. 실적 대비 주가의 괴리가 발생하는 구간이 매입 기회로 작용하는데 현재가 그러한 시기라는 분석도 나온다. HBM4에서 반격이 성공하고 파운드리 적자가 줄어든다면 밸류에이션 재평가를 받을 수 있다.

두 회사는 경쟁자이지만 동시에 같은 사이클을 탄다. AI 투자가 계속되면 둘 다 수혜를 입는다. 다만 수혜의 크기와 타이밍이 다를 뿐이다.
LEV’s Insight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운명을 가른 것은 HBM이라는 단 하나의 제품이었다. 10년 전 먼저 베팅한 SK하이닉스가 AI 붐의 최대 수혜자가 됐고, 규모를 믿었던 삼성전자는 뒤늦게 추격에 나섰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지금 가장 흥미로운 종목은 삼성전자일 수 있다. 주가가 충분히 빠진 상태에서 HBM4 반격이 성공하면 어떻게 될까. 메모리 투자는 결국 "누가 이기는가"보다 "언제, 얼마에 사느냐"의 싸움이다.